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쿠빌라이 칸 (문단 편집) == 평가 == 쿠빌라이 칸은 [[몽골사]] 내에서도 상당히 특이하며 의미가 있는 인물이다. [[칭기즈 칸]]이 '''[[몽골제국|몽골 울루스]]라고 하는 대(大) 세력의 시초'''가 되었다면 쿠빌라이 칸은 '''중국적인 의미에서 최초로 제국을 세운 인물'''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남송을 군사적으로 약소국이었다고 말하지만,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진 요, 금 그 어떤 이민족 국가나 몽골의 역대 칸들도 남송을 정벌하지 못했다.[* 1대 대칸 [[칭기즈 칸]]은 남송보다 금나라 -> 서하 -> 호라즘 순으로 정벌하다 죽었다. 2대인 [[오고타이 칸]]은 남송과 손잡아 금나라를 양면전선으로 밀어붙이고 유럽 정벌을 마저 끝내느라 바빴으며, 3대인 [[귀위크 칸]]은 부임한지 2년만에 죽었다. 4대 [[몽케 칸]]은 남송 정벌 중 병사하였다.] 이는 남송 자체가 군사적으로는 다소 열세였을지언정 그 저력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남송의 군사력은 북송 시절보다 강력했으며 오히려 그때보다 군사적 활약이 많았고, 공세적으로 나올 수는 없을 지라도 이민족 군대가 마음만 먹으면 내려와서 한번에 밀어낼 수 있는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 첫 번째로 고려되어야 할 요소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몽골과 같은 북방 민족들은 내륙지방 출신으로 수군을 운용할 필요가 없었기에 전통적으로 수군이 약했다. 몽골 제국조차도 쿠빌라이 이전에는 수군을 체계적으로 정비하고 조직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정도다. 기병이나 보병 중심으로는 강을 건널 때 막대한 피해를 입어야만 했다. 반면 남송은 사회 상류층 대다수가 부패했을 때에도 나라의 목숨줄과 똑같은 수군만큼은 상당히 강력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남송의 영역인 강남 지역은 곳곳에 습지와 강, 호수가 위치해 있어서 강남 진군을 위해선 반드시 수군이 필요하였다. 두 번째로 기후와 지형이 완전히 달랐다. 중국의 남쪽 날씨는 덥고 습하기 때문에 아무리 말중에 가장 뛰어난 내구력을 지닌 몽골말을 주력으로 한 강한 기병이라도 제대로 활약하기 힘들었다. 전 대의 칸인 뭉케도 사천 지방으로 들어갔다가 날씨와 기후의 탓으로 진군이 막히고 도중에 사망했을 정도다. 뭉케의 죽음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뉜다. 이질로 죽었다는 설과 성을 공략하는 중 화살에 맞아서 죽었다는 설 두 가지다. 과거 삼국시절 북방의 위나라 병사들이 오나라를 쉽사리 정벌하지 못했던 것도 같은 이유다. 기후와 토양이 다른 땅에 익숙지 않은 병사들이나 말이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웠다. 또한 [[연운 16주]]를 통해서 곧바로 본토가 공격받을 수 있었던 북송과는 달리 남송의 경우 장강, 회수, 사천의 산맥 등 국경 방어에 유리한 지형들이 많았다. 세 번째로 점령 이후 유지가 굉장히 어려웠다. 정주민족인 한족으로 구성된 중국인들은 북방에서 내려온 유목민족들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당연한 것이 쉴 새 없이 자기 땅에 내려와 죽이고, 약탈하는 과정에서 생긴 증오가 쉽게 사라질 리 없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생긴 증오와 공포 때문에 한족 중국인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쿠빌라이가 북중국을 장악하고 유학자와 농민들을 보호하면서 너그러운 정책을 폈음에도 유력 귀족들과 호족들이 송나라와 내통하거나 반란을 획책했을 정도니 반발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다. 네 번째로 남송의 경제력은 생각보다 강대했다. [[정강의 변]]으로 송나라가 강남 지역에 쫓겨났을 당시는 마침 강남 지역의 경제력이 본격적으로 폭발력을 나타내기 시작할 때였다. 중국사 전체에서도 경제력 면에서 황하 유역을 비롯한 북중국보다 강남 지역이 우위를 차지하기 시작하는 때가 바로 이 때였다. 사천과 강남의 막대한 생산력을 기반으로 남송은 양양과 번성과 같은 요충지 지역들에게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고, 이는 양양 공방전 때 몽골군이 크게 고전하는 등의 결과를 가져왔다. 게다가 이 경제력이 위의 반발심과 겹쳐서 몽골은 남송 공격 뿐만 아니라 점령 후 통치에도 굉장히 피곤한 시기를 거쳐야 했다. 그렇기에 남송을 정벌한 최초의 이민족 황제인 쿠빌라이는 중국적인 가치관을 받아들인, 혹은 그것을 인정한 칸이었고 그들을 위한 정책과 함께 굉장히 관대하면서 인내심 있는 전략을 펼치면서 남송 정복에 성공했다. 당장 그의 형인 몽케는 급하게 남송을 정벌하려고 했다가 처절하게 실패했을 뿐더러 자신이 견제하던 동생인 쿠빌라이에게 칸 자리를 넘겨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다른 칸들이었다면 결코 기다리지 않고 무작정 공격을 했을 양양 함락만 봐도 그렇다. 그는 몇 번 지휘관들을 질책하긴 했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장군들을 믿고 기다렸으며 이 과정에서 중국인들에게 야만인들의 왕이 아닌 관대한 황제라는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었다. 당장 금방 점령할 수 있었던 양양성에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항복 권유를 했으며, 끝까지 양양을 지키며 남송에게 충성을 바쳤던 성주 여문환은 이런 그의 대접에 감격하여 이후에 남송 정벌에 앞장서며 활약했다. 양양을 먼저 먹으면 나머지 지역은 손쉽다고 권하던 유정은 남송에서도 나름 명망높던 장군이었고 그의 항복을 받아들이며 중용한 것도 쿠빌라이 칸이었다. 그는 중국인을 보호한 최초의 칸으로 농지를 함부로 빼앗아 목초지로 만들지 못하게 했고, 중국인들의 눈에 위대한 황제로 보이기 위한 노력을 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위에서도 전술했던 근본적인 차별을 철폐할 수는 없었지만 그가 이런 정책을 펼치지 않았다면 남송을 정복하더라도 자기 치세 동안은 유지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기성에 사로잡히지 않았던 면모도 있었고 호기심도 많아서 다른 나라나 다른 민족의 역사나 문화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외손자인 [[충선왕]]이 세자 시절에 쿠빌라이 칸과 만났을 때 충선왕의 학문 스승들이 방에 들어오자 바로 의관을 정제하고 충선왕의 스승들을 예를 갖추고 맞이했으며, 그 스승들에게 고려의 역사, 풍속, 정치사에 대해 강론하게 하며 밤새도록 문답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고려처럼 저항한 세력들에게 다른 칸들보다 매우 관대했다. 양양을 수비하던 장수 여문환의 예에서도 볼 수 있으며 자신에게 항복한 사람들 대다수의 권리를 인정하고 그들의 지배를 인정해주었다. 항복한 자들을 용서하는 것은 몽골 군대의 전통적인 전략이기는 했으나 그만큼 관대하게 이 원칙을 확대해서 적용했던 칸은 없었다. 저항하는 자들은 철저히 짓밟고 보는 인간들이기도 하고. 이런 전략은 양양이 무너진 후 수많은 남송의 호족들이 앞다투어 항복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중국 천자 특유의 관대함을 지닌 사람이기도 해서 송말삼걸 중 한 사람인 [[문천상]]이 매우 뛰어난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죽이지 않고 잡아와서 회유를 시도했다. 문천상은 희대의 명문 정기가(正氣歌)라는 [[한시]]를 쓰면서 거부했고, 결국 어쩔 수 없이 처형했지만 마지막까지 두고두고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다른 칸들과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그는 '''[[천자]]'''가 되고 싶은 분명한 욕망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베트남 원정과 무리했던 2차례의 일본 원정을 단행했다. 심지어 3차 원정도 하려 했다가 1, 2차 트라우마와 재정적인 문제에 대한 반대가 너무 심해서 단념했다고 한다. 그는 중국인들뿐 아니라 세계로부터 글자 그대로 '''[[천자]]'''라고 인정받고 싶어한 사람이었다. 그의 이런 성향은 칭기즈칸 사후부터 가속화되었던 대몽골 제국의 분열을 더 심화시켰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실책이나 잘못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이미 칭기즈 칸 대에서 아들들의 분쟁[* 당시 칭기즈 칸의 제1부인의 아들은 4명이 있었는데 장남 주치에게 후계자문제를 논하자 차남 차가타이가 주치는 메르키트 부족에 의해 태어난 잡종일 수 있다며 반발하였다. 이후 차가타이는 3남 오고타이가 온화하니 오고타이가 차기 칸으로 적합하다며 추천하였기에 차남 차가타이&삼남 오고타이 vs 장남 주치&사남 툴루이로 다퉜다.]은 공공연한 일이었을뿐더러 그의 아버지 또한 칸의 자리를 노리다가 실패하여 형에게 죽었다는 의혹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원조비사]]에 따르면 금나라가 망한 후 오고타이가 죽을 병에 걸렸을 때 툴루이는 자기 목숨을 바쳐서라도 형을 살려 달라고 하늘에 기도했고, 오고타이의 병이 낫자 곧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툴루이가 한때 대칸 후보로 거론된 점 때문에 사실은 오고타이와 트레게네, 테무게 옷치긴에게 모살당했다는 주장이 있다.] 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 툴루이 이 네 사람의 후손들은 쿠빌라이가 집권하기 전부터 반목하고 있었다. 당장 몽케만 해도 칸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금기였던 [[황금씨족]][* 칭기즈 칸의 핏줄을 이은 왕족들을 말한다.]을 대량 학살했으며 그 윗대의 [[바투]]와 귀위크가 대립했던 것도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상 분열은 이미 칭기즈 칸 바로 이후의 대에서부터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쿠빌라이가 이것에 대해 한 가지 실책 아닌 실책을 굳이 뽑자면 그 자신이 중국적인 가치를 받아들임으로써 반대파에게 명분을 주었다는 정도일 것이다. 현대에는 몽골족과 한족 모두에게 관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는 인물이다. 몽골족의 경우 중국 전역을 손에 넣은 것 때문에 위대한 정복군주로 추앙하는 경우가 많지만, 다소 강경한 성향의 몽골 민족주의자들은 중국적인 가치를 받아들인 것 때문에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한족의 경우 중국적인 가치를 추구하고 항복한 한족에게 관용을 베풀며 남방 한족들에게 광범위한 자치를 허용한 것 때문에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다소 강경한 성향의 한족 민족주의자들은 원나라의 중국 통일 이전 마지막 한족 왕조였던 남송을 멸망시킨 것 때문에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